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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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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국왕
태종 | 太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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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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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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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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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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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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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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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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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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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왕 | 조선 국왕 대리청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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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상왕 | 조선 국왕 대리청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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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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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태조실록 총서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휘는 방원(芳遠)[11], 자는 유덕(遺德).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조선 개국을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포은 정몽주를 살해하면서 아버지에게 큰 노여움을 샀고, 조선 건국 뒤에는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을 뿐, 정도전[12], 심효생, 남은과도 갈등하며 왕세자로 책봉되지는 못했다.[13]
이에 1398년(태조 6년)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을 일으켜 계모인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왕세자 이방석과 이방석의 친형인 이방번[14],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모두 장악하였다. 이어 태조가 둘째 아들 이방과[15]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남에 따라 사실상 차기 왕의 자리를 공고히 하였으며, 1400년(정종 2년)에 태조의 4남이자 동복형인 이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마저 진압하고 그의 일파까지 모조리 숙청함에 따라 형인 정종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정적 뿐 아니라,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공신들과 외척들이라 할지라도 냉정하게 숙청하였으며, 자신의 후계자인 세종의 선정(善政)의 바탕이 되었다. 그 외에도 사실상의 2대 군주로서 혼란스럽던 건국 초기의 상황을 수습하고 신생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태종이라는 묘호에 어울리는 업적을 길히 쌓았다.
2. 묘호와 시호[편집]
"고애자(孤哀子) 사왕(嗣王) 신(臣) 【휘(諱).】[16]는 삼가 재배(再拜) 돈수(頓首)하고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큰 덕(德)과 높은 공(功)은 전고(前古)에 뛰어나니 큰 이름을 시책(謚冊)에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 휘호(徽號)를 올립니다. 공손(恭遜)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께서는 총명(聰明)하고 신성(神聖)하며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다한 때를 당하여 천심(天心)의 돌아가는 바를 알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만세의 터전을 비로소 개척(開拓)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가 고황제(高皇帝) 를 뵈올 때 세 번이나 접견(接見)하는 총영(寵榮)을 받았습니다. 일이 기미(幾微)[17]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적에 환하게 알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길이 평안(平安)하게 하였습니다. 천부(天賦)의 사랑이 오직 어버이에게 깊어 승안(承顔)[18]의 효(孝)에 지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우애(優愛)하여 이에 양덕(讓德) 의 빛을 내려 주었습니다.
무위(武威)는 바람과 우레보다 엄숙(嚴肅)하고 문치(文治)는 해와 달보다 밝았습니다. 교린(交隣)하는 데 도(道)가 있고 사대(事大)하는 데 정성(精誠)으로 하니, 덕화(德化)가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흡족하여 은혜가 동물이나 식물에까지 미쳤습니다. 외람되게 큰 왕통(大王統)을 이어받은 것을 생각하여 나이가 오래되시도록 영화롭게 봉양(奉量)하리라 기약하였더니, 어찌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이에 말명(末命)[19]을 남기십니까?
울부짖고 통곡하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 이에 현양(顯揚)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謚)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령(靈)이 충감(沖鑑)을 굽어 내리어, 길이 다복(多福)을 주시어 자손(子孫)을 무궁한 앞날에 보호하시고, 국가의 계책(計策)을 그윽이 도와주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구원(久遠)하게 하소서. 삼가 말씀드리옵니다."
我馬帶矢 于廐猝來 願陪聖宗 九泉同歸
말이 화살을 맞아 마구에 들어오거늘, 성종[20]을 모셔 구천에 가려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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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태종(太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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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3. 이름과 작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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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수결(手決,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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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전에 태어나 원래 왕족이 아니어서 피휘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짓지 않은 왕족이 왕이 되면 피휘 문제 때문에 개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종은 승하할 때까지 개명 없이 흔히 쓰이는 꽃다울 방(芳)과 멀 원(遠)자를 휘로 계속해서 사용했다.[23] 사실 피휘에 대한 규칙을 담고 있는 예기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모친 안징재의 예를 들면서, 피휘할 이름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두 글자 이름도 실질적인 피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위 규칙을 따라 개명과 피휘를 모두 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는 중국사의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인데, 그가 죽은 뒤 낱글자 피휘 금지가 후손에 의해 뒤집히면서 책 한 권에 100번은 나올, 방원보다 더 흔해빠진 한자들인 세(世)와 민(民)이 따로 쓰이는 경우까지 모두 피휘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이 두 글자의 형태가 변형되거나 아예 뜻이나 모양이 비슷한 다른 한자로 대체되는 바람에 복잡한 한자로 된 문서들이 당나라 때 잔뜩 생겨났다. 이런 사례를 의식해서인지 아버지 이성계는 왕이 되고 '이단'(李旦)으로 개명했고, 형인 정종 이방과는 '이경'(李曔)으로 이름을 바꾸었음에도, 정작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전부 외자로 지어놓고도 본인만은 원래 이름을 고집한 이방원이 독특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는 아버지 이성계처럼 본명인 '이방원'으로도 유명하다. 위의 수결(手決, 서명)도 이름자인 '방원'을 갈겨 쓴 것이다.
자기 이름에 대한 애착이 있긴 했었겠으나, 피휘는 왕의 권위에 훨씬 더 중요한 예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비와 양민들 불편하지 말라고 피휘 관리를 과감히 포기한 걸 보면 시원한 인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4]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권위에 자신감이 넘쳐 후대가 감히 자신의 결정을 뒤집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과시적 행위일 수도 있다. 실제로 같은 시기 이전 왕조들에 비해 강력한 군주권으로 유명했던 명나라 황제들은 이전 시대와 달리 역시 흔한 한자로 된 이름을 가진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을 시작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자가 들어간 두 글자 이름을 여러 세대에 걸쳐 잘만 썼고, 이에 따른 낱글자 피휘 금지도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비교적 흔하지 않은 부수를 사용한 외자로 지음으로써 본인의 사례를 관행으로 만들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이방원이 독보적인 사례가 되었다.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대에는 고려 말기의 왕자 봉작제를 따랐다. 따라서 태조 대의 이방원의 호칭은 정안군이었다. 이후 1398년 9월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왕친의 봉작이 개정되어 임금의 친왕자의 호칭이 공(公)이 되었다. 이에 정종 실록에는 이방원의 호칭이 정안공으로 기록된다. 이후 태종 본인이 임금으로 즉위한 직후 태종 1년(1401) 1월 공(公)이라는 호칭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개정했고, 이후 다시 대군(大君)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최초로 대군(大君)이 된 사람들은 이방원의 친형제들이었다. 태종의 아들들인 효령대군, 충녕대군은 관례를 마친 후인 1412년에 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414년 태종은 여덟살의 아들을 성녕대군으로 봉하며 왕의 아들로서 적비 소생은 대군(大君), 빈 소생은 군(君)으로 호칭을 완전히 법제 확정하였다.[25] 따라서 이방원은 '정안군', '정안공'이었던 적은 있으나 '정안대군'이었던 적이 없었다. 반면 이방원의 친형인 이방의와 이방간은 1401년 태종의 호칭 개정에 따라 각각 익안대군, 회안대군이 되었다. 그들도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태조 시절에는 익안군, 회안군이었고,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익안공, 회안공이었다.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쓰며,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예전 사극이나 소설 등[26]에서도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안대군이 틀린 표현이라며 이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후에 확립된 표기를 따라 관례적으로 대군이라 칭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 자체도 옳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이성계의 왕자들은 조선시대의 야사집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옛날 일을 말할 일이 생기면 대군이라 호칭되었을 것이다.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친아들을 대군이라고 하는 것이 후대에는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이성계의 직계 선조들이 싸그리 임금으로 추존되는 판에 나머지 왕자들을 대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이미 왕이 된 정종과 태종을 대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이는 이미 더욱 높은 자리인 왕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일반적으로 아무개 임금이라고 하지 아무개 왕자라고 하지 않는 데다, 어쩌다 왕자 시절의 호칭을 언급하더라도 대군 호칭 사용 이전의 과거 발언이나 표현을 인용하는 과정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작중 인물의 대사로 나오면 오류.
7.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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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처음으로 길들여본 왕이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전체는 이 처음 보는 짐승에 놀라 서둘러 구경을 오고 난리법석이었다.[30] 그런데 문제는 전직 공조판서인 이우(李禹)가 코끼리를 보고 추하게 생겼다며 대놓고 놀려댄 데다가 침까지 뱉는 바람에 화난 코끼리가 그를 밟아 죽였다는 거다. 이에 놀란 태종은 처음에는 코끼리를 살처분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선물해준 것이라 외교상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결국 전라도 순천도호부 장도(獐島)[31]로 코끼리를 귀양보냈다. 그러나 코끼리가 섬에 귀양간 뒤부터 미역과 풀 등의 모든 먹이를 거부하고 슬프게 울기만 하여 뼈와 가죽만 남을 정도로 말라버려서 이를 불쌍하게 여긴 태종이 결국 1년만에 귀양을 풀어주라고 했으나 먹이를 워낙 많이 먹어대는 터라 결국에 전국에 돌아가며 사육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이후 세종의 집권기에서야 관찰사의 상소로 다시 섬 가운데의 목장 지역으로 가게 되고 이후에 실록 내에서 코끼리의 기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기록상으로 보면 코끼리는 조선 입장에서는 식량만 축내는 애물단지였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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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원나라에 그랬듯 조선 역시 명나라에게 공녀를 바쳤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얼굴에 침이나 뜸을 들이고 약을 붙이는 등의 방법을 쓰는 자들에게는 왕명을 거역한다는 명분으로 엄벌에 처하며 가산까지 전부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300명의 공녀 후보자를 44명으로 압축했다가 5명으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태종은 환궁한 후 대신들에게 대상자들로 선정된 여자들에 대해 "누구는 얼굴이 관음보살같아 애교가 없네. 누구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네. 그게 무슨 인물이냐?"라고 불평했다. 공녀 차출에 대해 원통함을 느끼며 혹시나 자살 시도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중종과는 정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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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시대에 왕실의 많은 인물은 초상화가 남거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태종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적은 편. 용장의 포스를 느끼는 어진이 남은 아버지 이성계, 실제 초상화도 남아있는 친형 익안대군과 사촌형 이천우, 어진은 소실됐지만 기록상 곰처럼 강건한 체구에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는 외모 묘사가 있는 형 이방과, 초상화가 남은 아들 효령대군, 고기를 많이 먹어 비만 체형이었다는 아들 세종에 비하면 태종은 잠저 시절부터 외모에 대한 묘사가 유독 없었다. 태종에 대한 외모 묘사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 몇 가지가 있는데 <태조실록>에서 태조가 명나라 사신을 보낼 때 아들 이방원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가겠다고 하니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병약해서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기록을 보아 무인 집안의 아들치고는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태종은 어려서부터 무예보다는 문재에 뛰어났고[34] 성균관 생활을 하며 수도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니 형들처럼 우락부락한 체형보다는 마른 체형의 타입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종은 명나라 사신 업무도 무난히 해냈고 장수까지는 아니라도 당대 군주치고는 살만큼 산 나이이며(54년 11개월)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그가 딱히 병에 시달렸다는 설명은 없다. 태종은 세종 4년이던 1422년 5월 사망했는데 3월과 4월에 연달아 사냥을 나갈 정도로 건강했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아버지 태조나 형 정종 수준이 아니었을뿐 태종 역시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강인한 신체를 지녔을 확률이 높다.[35] 또한 태종 본인의 피셜로는 효령대군이 자신의 닮은 꼴이라고 언급한 적이있다. 또한 효령대군 초상화 기록에 의하면 양녕대군, 세종과 닮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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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직접 목숨을 빼앗은 정도전도 그 과정과 결과를 감안할 때 의외로 사후 처분은 관대하게 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정치 숙청을 단행할 때는 역모 혐의를 적용해서 가문과 명예를 박살내고 다시는 복권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매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태종은 정도전 본인에게만 '종친 모해죄'라는 다소 어정쩡한 죄목을 붙이고 명예를 추탈했을 뿐 부인 및 자녀들은 잠시 노비로 전락했다가 몇 년 뒤에 복권시켜서 정상적으로 벼슬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36] 이후에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별다른 연좌제의 피해를 입지 않고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으며 연산군 대에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이 정승이 되기도 했을 정도. 사림이 정문형의 정승 취임을 반대할 때에도 정도전의 증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공적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했다. 물론 정도전 본인은 국적이어서 선조 때 기축옥사에 휘말린 진주의 선비 최영경은 "그대가 혹 길삼봉이냐?"라는 물음에 "역적 정도전의 호가 삼봉(三峰)인데 어떻게 삼봉이라는 이름을 쓰겠느냐"고 답했다. 광해군 때 허균을 고발한 기자헌의 아들은 그 사유 중 하나로 정도전을 현인이라 칭했다는 것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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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1,2차)과 숙청으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그가 죽인 인물은 의외로 그렇게 많지는 않다. 태종은 왕권 안정을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핵심인물만 핀포인트로 제거했으며 연좌제가 당연시되던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이나 주변 인물은 거의 건들지 않았다. 잠재적인 권신이 될 수 있는 외척 세력만 철저히 숙청했을 뿐 왕권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우는 충분한 명분이 있음에도 오히려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애당초 먼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측근이었던 세력이라든지 자신의 공신들은 권력에서 밀어냈을 뿐 어지간 해서는 죽이지 않았다. 친형 이방간은 물론이고 불온한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여러 신하들도 내버려 두었다.[37] 동시대 중국의 홍무제(주원장)나 영락제가 공신을 숙청한다며 9족과 10족을 멸하며 10만명 단위로 자신을 도왔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대량 학살했던 것과는 애초에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보통 이렇게 권력을 위한 숙청에서 자기 편은 건들지 않거나 국가에 해가 없음에도 마음에 안 든다고 없애버리는 일이 역사적으로 많은데 태종의 경우 "장기적으로 왕권에 손해가 될까? 아닐까?"를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숙청하였다.[38] 때문에 Badass 기질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세종대왕 그 이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기도 했다.
8. 가족관계[편집]
9. 대중매체에서[편집]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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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제도: 영락제년간[41]에 최초로 시행되어 선덕제년간[42]까지 약 25년간 시행되었던 조선 시대의 공녀 제도에 대하여 다룬 글이 메인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이 명나라에 바친 여성 114명의 삶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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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 : 태종 대에 처음으로 실시한 민생정책. 초기 백성들의 억울함을 듣고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태종 사후에는 점차 후기로 갈 수록 신문고는 여러가지로 허락을 맡아야 쓸 수 있는 점에 멋대로 북을 쳤다가는 지방 고을 사또에게 엄한 고초를 받았던 폐해가 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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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 제도: 조선의 중국 황제에 대한 조공 봉납은 표전(表箋)문제, 고명인신(誥命印信) 문제, 일년삼사(一年三使) 문제가 모두 해결된 태종 대부터 크게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태종의 탁월한 판단으로 인해 조선은 큰 무역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 태종 대의 무역 혜택에 관한 글. 정도전 없어진 조선, 얻은 것과 잃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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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왕사 금탑
[1] 현재 효령대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실제 어진은 이미 조선시대에 소실되어 헌릉 봉향회에서 2013년도에 새롭게 제작된 상상화 어진이다. 아버지 이성계나 셋째 형 익안대군, 차남 효령대군, 그리고 손자인 세조의 얼굴을 통해 태종과 세종의 얼굴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의 친형인 익안대군의 초상화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아들이나 손자 얼굴의 중간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태종 이방원의 용모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다만 태종까지는 곤룡포가 청룡포였다.[2]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6-10[3] 상왕 및 태상왕 신분으로 4년 동안 병권 등 일부 분야를 대리청정 하였다.[4] 세종이 즉위한 이후 부왕인 태종을 태상왕으로 높히려 계속해서 시도하였으나 태종이 극구 사양하였고 결국 태종은 마지못해 승하하기 1년 전인 1421년에서야 태상왕이 되었다.[5] 조선시대 중에서 묘호 대신에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군주이며, 끝까지 피휘와 외자 이름을 쓰지 않은 조선 사상 유일한 군주다. 오히려 태종은 자신의 이름을 마음껏 써도 된다고 하였다.[6] 태종(조선)/생애 문단 참고.[7] 조선 군주 중 가장 자녀가 많다.[8] 왕의 적자를 대군으로 봉하는 작위 제도 개정은 태종이 왕이 된 이후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진안대군과 달리 대군 작호 소급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대군 또는 후술 문단으로.[9] 굵은 글씨는 1871년 고종이 추가로 올린 존호이다.[10] 굵은 글씨는 1683년 숙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이다.[11]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아버지인 이성계와 함께 묘호보다 본명이 더 유명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왕위에 오른 뒤보다 오르기 전 행적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군주 중에는 매우 희귀하게도 피휘를 안 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위 후 피휘를 위한 개명을 안 하는 대신 피휘 관리(처벌)도 안 하겠다는 관대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12]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의 경우 이방원도 세자가 될 가능성을 열어놓은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태조가 이방원을 배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 역시 신덕왕후 소생 자식들 중 이방석 쪽을 세자로 추천했다.[13] 이방원의 성격이나 정몽주 살해 등 과격한 행태에 이성계가 반감을 품었다는 추측 이외에 이방석이 이방번까지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 것에 대해 철원 최씨, 안동 권씨, 황려 민씨 같은 고려 구 외척 세력과의 연결고리가 적은 편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지 이방번의 성격 문제로 이방석이 세자가 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 외에도 왕후 역시도 조선 개국에 많은 도움을 준데다 태조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점에서 그 소생인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는 것 역시도 자연스러운 해석이다.[14] 방번은 원래 방원이 세자 문제와 관련 없었고 살릴려고 했으나, 태종 이방원 바로 위의 형인 회안대군이 "역적의 씨앗은 하나라도 살려둬선 안된다"고 하면서 상의도 없이 성밖을 떠나는 방번을 길거리에서 그대로 죽여버렸다. 그 이후 갈등이 고조되어 제2차 왕자의 난이 초래되는 큰 불씨를 남겨놓게 된다.[15] 태종은 형 정종에게 묘호 대신 공정왕(恭定王)이라는 시호만 올렸으며 이로 인해 정종은 오랫동안 그 지위가 애매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는 300년이 지난 숙종대에 다시 올린 것.[16] 세종이 승하한 부왕(태종)에게 올리는 글이므로, 여기에 들어갈 휘는 세종의 본명인 '이도(李祹)'가 된다. 그러므로 비록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는 뒤에 오는 조사가 '은'으로 쓰여 있지만, '이도'를 적용하면 뒤에 오는 조사는 '는'이 맞는다.[17] 낌새[18] 즐거운 얼굴로 부모를 뵘.[19] 마지막 유언[20] 聖宗, 이방원을 지칭함[21] 또한, 종묘에 불천위(不遷位)(옮겨지지 않는 위패. 세실은 종묘에 대대로 모셔도 5대의 대수에 포함되지 않는 큰 공덕을 쌓고 평가받은 왕에 한하여 정전(正殿)에 계속 모시는 것을 말한다)로 지정, 존재되어 종묘에서 신주를 별전인 영녕전(英寧殿)으로 내보내더라도 세실로 정함으로써 아버지 태조와 함께 영원히 종묘 정전에 모시는 크나큰 혜택을 누리게 된다.[22] 조선 9대 왕인 성종(成宗)의 묘호와는 한자 뜻이 다르다.[23]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중국사 대표 피휘 사례 중 하나인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다. 이름이 '邦' 자인데, 건달에서 황제가 된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이 글자를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때까지 '수도' 라는 뜻으로 쓰이던 '國' 자가 나라를 뜻하는 글자로 대신 쓰이게 되었다.[24] 태종이 쓸데없는 관습에 얽매인 사람이 아닌, 깨어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는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조선이 대역죄인에게 형식적으로는 능지형을 내리나, 실제로는 극히 비윤리적인 능지형을 안하고 거열형만을 하게 된 부분(물론 거열형도 끔찍하지만 능지형은 비교도 안되게 죽음의 고통을 너무 길게 가져간다)도 기록상 이방원이 언급하였기에, 이방원의 영향인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왕이 죽으면 그 자식들은 음식을 가려 먹는게 당시 지극히 당연한 법임에도,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아들인 세종이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죽어도 상중에 고기를 마음껏 먹으라고 유언을 그렇게 남기고 죽은 인물이기도 하다.[25] 효(孝)령, 충(忠)녕, 성(誠)녕의 군호는 돌림자 '-녕'을 제외하고 의도적으로 유교의 중심 가치인 효와 충성을 의도하여 작명되었고, 이후 왕자들은 원래대로 명목상 봉토로서 땅 이름으로 군호를 삼았다.[26]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같이 활용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선 정안군, 정안공, 정안대군 3가지 호칭을 모두 들을 수 있다.[27] <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 곤충이라 곡식 외에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했다.[28] 이 둘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아버지를 도와 국가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경쟁자였던 형제를 제거했고 후계자를 세울때 문제가 많은 첫째아들을 폐하고 셋째아들에게 넘겨주었다.[29]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 근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다. 그러자 하늘에서 까치떼와 까마귀떼가 내려오더니 그 송충이들을 다 먹어치웠고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 당태종이나 조선 태종의 일화가 백성을 위한다는 면모를 강조한다면 정조의 일화는 효심을 강조하는 전개.[30]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귀는 파초잎과 같고 눈은 작고 네 다리는 통나무, 코는 누에와 같다고 나온다.[31] 현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의 장도로, 현대에는 율촌산단을 조성하면서 매립해서 육지가 되었다.[32] 만약 1500여 년 전 로마에서 잡혔다면 코끼리는 황제 앞에서 글자를 쓰는 등의 재주를 익혀 나름대로 쓸만한 수준이 되었겠지만 조선은 코끼리 서식지와 멀리떨어져있고 중국 최남단 지방이나 동남아 국가에서 사육사를 데리고 오는게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그걸 감안해도 코끼리는 키우는 데만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동물이었다. 오죽 비용이 많이 들면 아시아코끼리가 자생하는 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왕이 미워하는 신하에게 코끼리를 하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를 키우려니 살림이 거덜나고 그렇다고 죽이거나 다른데 넘기려니 왕이 하사한 놈이라 불충이 되기 때문...[33] 다만 그렇다고 사관들을 몰살하거나 제도를 없애는 일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당시 사관들이 너무 극성인 것도 있었고. 특히 민인생은 왕의 사적공간까지 침입한 정신나간 인물이라 사관 중에서도 특이한 편에 속했다.[34] 무력의 관한 기록은 활을 잘쏘고 사냥을 활발히 했다고 언급되있다.[35] 취미가 사냥이었던 인물인만큼 진짜로 신체 능력이 빈약한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애초에 그에게 '병약하다'란 평을 한 이성계가 고려의 무장 시절 패배를 모르는 장수이자 불세출의 신궁인걸 생각하면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거기다 태조가 이 말을 했던 시점이 이방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직전이었는데 비록 정몽주를 죽인 미운 자식놈이긴 해도 나라를 위해 먼 거리를 가겠다고 하니 태조 입장에서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가 보기에 기특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을테니 이런 복합적인 마음 때문에라도 이런 말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명나라와의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어서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물론 당시 사정상 보낼 수밖에 없긴 했지만 이방원이 명나라에 가게 된 것은 자천타천이었는데 타천이 바로 정도전이었고 당연히 이는 남의 손을 빌어 죽더라도 좋지 않겠는가라는 차도살인의 심산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말이다.[36] 정도전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1차 왕자의 난 당시 두 아들은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죽었고 한 아들은 집에서 자살했다. 장남은 임금을 모시고 있어서 살아서 수군이 되었다가 태종 7년에 복직되었고 세종 시기 형조판서까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37] 이방원이 이방간을 살려준 것에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는데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왕실 내에서 피바람이 몰아친 마당에 동복형제까지 죽였다가는 아무리 진압의 명분이 정당하다 해도 민심이 흉흉해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으로 본인의 집권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전체의 정통성에도 흠집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임을 박포에게 몰고 이방간의 목숨을 살려준 것. 이성계와 이방과가 동의한 것도 가족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이 부분도 있었다.[38] 세종의 장인 심온의 경우 과민 반응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다만 이 경우 아들이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 모르므로 최대한 아들이 왕 노릇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내린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결단력과 총명함을 겸비한 명군이었지만 만약 세종이 능력은 뛰어나나 정에 약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이었고 심온의 가족들이 권력욕이 있었다면 외척들에게 휘둘릴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 실제로 심온 본인은 몰라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여러모로 자중하지 않고 태종의 심기를 꾸준히 건드렸다. 청송 심씨의 권력 자체도 이미 태종이 숙청한 여흥 민씨에 못지않게 강력해 안 그래도 어그로가 뿜어져나오는 가문이었는데 몸을 사리기는 커녕 대놓고 숙청해달라는 수준으로 나대고 다녔으니 태종의 숙청의 레이더에서 끝내 벗어날 수가 없었다.[39] 고려시대 과거는 진입 장벽이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유는 고려시대의 과거 제도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무과를 치르지 않았고 문과와 잡과만 치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니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어려운 시험을 불과 17세(현재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응시자 중 나이 기록이 있는 사람 중 최연소)에 해당하는 나이에 붙었으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40] 정도전은 18세, 정몽주는 19세. 당대 여말선초의 제일 석학들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다. 특히 고려시대의 과거 시험은 족벌화가 매우 심해서 감독관의 제자들이 대부분 합격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고평가 받을 부분이다.[41] 1408년, 태종 8년.[42] 1433년, 세종 15년.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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